괴테(1749~1832년 독일)는 평범한 집안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릴 때도 있었지만 82세까지 장수하였다. 그는 말년에 가까워 많은작품들을 발표했다. 오늘날‘고령화’시대를 맞아 괴테의 삶이 흥미롭고 인상적인 것은 그가 장수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가 다양하고 풍성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몇 살까지 살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시간에 내적 외적으로 어떻게 충일(充溢)한 삶을 사는가 하는 것이다. 폴 발레리(1871~1945 프랑스)는 괴테를 변신의 천재라고 불렀다. 그래서“시인(詩人)이자, 프로테우스(;변신에 능했다는 바다의 신)의 많은 인생을 살았다.”라고 했다.
괴테는 궁신, 장관, 관리, 시인, 화가, 수집가, 자연 연구가 등 연극 감독이었다. 괴테의 삶의 기술은 자신을 한 가지 역할과 한가지 모습으로 국한하거나 국한 당하지 않고, 다양한 역할과 모습으로 살았다는 데에 있다. 괴테는 우리에게 삶의 기술에 대한 시기적절한, 새로운 모델을 남겼다. 삶은 엄격한 의미에서 삶을 배우는 것이다.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 말이다. 이것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다. 그리하여 괴테의 통찰은 이러했다.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제한 속에서 차츰차츰 방법을 만들어 가야 한다. 전해 내려오는 원칙을 따르는 것이나 정해진 인생 계획이나 삶의 방식을 준수하는 것은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괴테는 부단히 그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시도하고 결과를 내고, 수정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일련의 실험만이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전진하게 한다. 괴테는 쉼 없는 활동을 변호한다. 그럴 때 만이 우리가 어디에 적합한 사람인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전제는 긴 인생이다. ‘살기 위해’ 인생을 배우는 것은 ‘차츰차츰’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괴테는 위엄 있는 고전주의자라는 면으로 미화되기도 했지만, 심하게 자기 시대에 반하는 변화무쌍한 삶을 살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17세 연하의 여인에게서 사생아를 낳았고, 그 아들이 17살이 되었을 때 결혼식을 올렸다. 74세에 19세 아가씨를 향한 연정을 불태우며‘마리안 비트 비가’를 쓰기도 했다. 시민 세대들에 의해 언뜻 규범적인 삶을 산 것으로 비추어졌던 괴테는 알고 보면 모든 관습을 거부하고, 자아를 펼치고 자신의 가능성을 알아가는 삶을 살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개인의 문화가 긴 인생을 바꾼다. 괴테는 긴 인생에서 개인적인 문화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런 면이 고령화 사회에서 괴테가 우리에게 매력을 행사하는 이유다. 긴 인생이 가져다주는 모든 어려움과 타격에도 불구하고, 또 노년이 동반하는 모든 제한과 실망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깨달은 삶의 과제를 끝까지 부여잡고 결국에 이루어내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작가는 괴테의 긴 인생을 통해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소설‘위대한 캐츠비’의 작가 스콧 피쳐제랄드는 1920년대에 또 다른‘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일생’이라는 놀라운 단편소설을 썼다. 벤자민은 머리가 하얗고 턱수염이 긴 70세 노인이다.
스콧 피츠제랄드의 흥미로운 이야기에서는 인생의 시간이 거꾸로 된다. 노인으로 태어나 신생아가 되어 세상에서 퇴장한다. 인생 시간의 배열(排列)이 거꾸로됨으로 인한 그로테스크(;grotesk 기괴한)한 소외는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인간의 삶을 표현하기 위한 현대적 양식이다. 벤자민 버튼의 이러한 운명은 우리의‘초현대적인 인생 이력’을 대표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나이가 듦은 젊음의 또 다른 이름이다. 자아를 펼치고 실험하고, 마음껏 자신을 발휘하고 반항하는 등 젊음을 상징하는 특성들은 지난 세기가 흐르면서 청소년기뿐 아니라 인생의 다른 시기에도 해당하는 것이 되었다. 노년층은 퇴직 이후의 시간들을 두 번째 청춘으로 경험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노년을 두 번째 혹은 세번쨰 사춘기처럼 경험한다. 노인들은 이제 스스로 나이보다 더 젊게 여긴다. 지난 몇십 년간 일련의 성공적인 소설과 영화는 청년과 노년이, 손자와 조부모가 세대를 뛰어넘어 서로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는 것을 소재로 하였다. 1971년 영화화된 콜린 히긴스의 소설 <19 그리고 80>은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이 소설에서 10대인 헤롤드는 명랑하고 즉흥적인 할머니와 열정적인 관계를 맺는다. 이 영화는 전통적으로 젊음의 상징으로 치부되는, 즉흥적이고, 냉담하고, 가볍고, 개방적인 태도가 노년과도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노년은 많은 인생 경험을 축적했다는 이점이 있다. 그리하여 앞으로 진정한 젊은이는 노인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피츠제랄드가 쓴‘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일생’도 그렇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노년이 겉보기보다, 전통적으로 생각되던 것보다 젊음을 더 많이 품고 있다고 말이다. 다양함에 대한 찬양 고슴도치와 여우의 이야기이다. 여우는 많은 것을 안다. 그러나 고슴도치는 하나밖에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위대하다. 이런 수수께끼 같은 문장은 고대 그리스 시민 아킬로쿠스- 기원전 680-640년의 글 속에 들어 있다. 그 수수께께 같은 문장의 현대적인 적용에서 지식이나 기질의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인생을 영위하는 전략에 관한 것이다. 여우는 추구하던 결과에 도달할 때까지 오랫동안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시험해본다. 그러면서 여우는 계속 행동 방식을 변화시킨다. 여우에게 인내심이나 목적 지향성 같은 것은 없다. 반면 고슴도치는 모든 것을 하나의 카드에 건다. 그것은 고슴도치의 삶에 완결성을 주고, 쓸데없는 공격을 당하지 않도록 해 준다. 과연 그 어떤 전략이 더 나은가? 여우의 인생 기술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미지가 좋지 않다. 여우는 사기꾼이자 책략가요 위장의 달인이자 교활한 모사꾼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괴테에게서 여우와 맥락을 함께하는, 도덕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사고가 시작되며,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자신 외의 그 어떤 힘으로부터도 규정 받지 않는 자율적인 인간은 여우의 탈을 쓰고 등장한다. 이 우화와 같은 이야기를 통해서 여우는 지혜로운 동물로 상징된다.
‘이솝 이야기’에서 동물 왕국의 왕, 사자가 병이 나자 모든 동물들에게 병문안을 오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여우만이 병문안을 가지 않는다. ‘왜 병문안을 가지 않느냐는 질문에‘사자의 동굴로 들어가는 동물의 발자국은 보았으나, 나오는 발자국은 보지 못했다.’고 답한다. 그는 지혜로 그 자신을 구했다. <저작권자 ⓒ 경기실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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