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웰다잉-특별기고> 아름다운 삶과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

송계순 부천웰다잉문화연구원장

장상옥 | 기사입력 2023/07/05 [09:17]

<웰다잉-특별기고> 아름다운 삶과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

송계순 부천웰다잉문화연구원장

장상옥 | 입력 : 2023/07/05 [09:17]

▲ 송계순 부천웰다잉문화연구원장    

 

충남 공주시 계룡면(산) 갑사(절) 아래 무당촌이 있다. 30년 지기 예장(합) 신대원 원우 000 선교사의 고향마을에 가서 후대를 받으며 하룻밤을 지냈다. 그는 평생을 뿌려왔고 또 뿌리고자 하는 복음의 ‘씨앗’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선별하여 알뜰히 준비한 씨앗을 중국 대륙에 뿌리기를 30여 년, 이제는 조선족(우리 민족)이 아닌 중국 원주민 한족들에게 뿌리는 일(선교)을 하고 있다. 나는 그의 삶의 아름다움과 아름다운 마무리의 삶을 보았고 들었다. 그는 성경이 밝히고 있는 인간의 삶과 필연적인 죽음에 대하여 성경을 바탕으로 깨우쳐 전파하며 자신의 삶을 살고 있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Well Life(참 생명)’ 인즉 Well Being, Aging, Well Dying일까? 프랑스의 “죽음 앞의 인간(L'homme Devant la Mort)"이란 책에서는 누구의 죽음인지? 죽음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지? 내세관은 어떠한지? 죽음과 악의 관계는 어떠한지? 등에 따라 중세 이후 시대별 죽음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하여 아는 것은 3가지이다. “#한번은 죽는다. #아무도 같이 가지 못한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르는 것 또한 3가지니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BC372~BC289)”의 가르침인즉 공동묘지, 시장, 글방을 찾아 이사하여 가르침은 매우 귀한 것으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가르침이라 힘주어 말한다. 

 

우리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배우면 자연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된다. 거듭 말하거니와 인생이 잘 사는 삶이란 바꾸어 말하면 잘 죽는 삶이다. 당하지 않고 맞이하는 죽음이란 이야기이다. 솔직히 ‘죽음’은 사실 생각을 할 수도, 해 볼 수도 없다. 왜? 아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생각할 수도, 생각을 해 볼 수도 없는 것을 좀 더 깊이 생각을 하다 보면 뜻하지 않은 좋은 삶을 깨닫게 된다.

늙음은 갑자기 찾아오는 불청객이 아니다, 누구나 이 순간도 늙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늙어가는 인생인즉 ‘오래 사는 삶’을 인생 두 번 사춘기의 삶으로 즐기며 사는 이도 있다. 그래서 ‘죽음’이 가까우면 삶을 더 즐기란다. 그래서 즐기다 보면 삶이 더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 특별히 외로운 노인의 때는, 진정한 자아와 만남의 시기란다.

 

‘죽음’이 두려워서 오래 살기를 원하는가? 

아니 오래 살기를 위해 ‘죽음’이 두려운가?

 

우리는 이‘죽음’을 드러내고, 바라보고, 생각하는 삶을 살아보자. 

‘죽음’을 맞이해야 할 살아있는 존재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경신 저 “죽음 연습”에서)

 

「죽음이 죽었다. 삶이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죽음이 삶을 간섭하지 못해서, 삶이 죽음과 함께 살지 못해서, 죽음이 죽음으로 살지 못한다. 죽음이 죽지 못하고, 죽어서 삶이 삶으로 살지 못한다.」 이문재 시인의 백서다. 

 

“죽음은 일상이지만, 죽음이라는 단어가, 서서히 사라지면서, 대신 건강, 수명, 노년, 복지란 단어가 그 자리에 등장하여, 죽음은 주변화하고 말았다.” 이는 서울대 정진홍 교수의 말로서 ‘죽음을 잃어버린 사회’에 대한 담론이라 하겠다.

 

인간의 ‘죽음’을 성경에서는 천국에 이르는 통로로 본다. 이는 마치 태아가 한 여인의 음경에 통로를 통해 그 아픔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처럼, 한 인생은 죽음에 통로를 통해 그 아픔으로 또 다른 세상에 태어남과 같다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인간을 음경의 통로를 통해 낳고, 죽음의 통로를 통해 죽는다. 그런데 태어나는 아이 태어나는 세상을 알고 태어납니까? 죽는 이가 죽음 후의 세상을 알고 죽습니까? x 성경은 밝히고 있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으로 복되다 하였다. 왜? 죽음의 통로를 통해 영원한 나라를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샤마니즘 적 죽음에 대한 상(喪)과 곡(哭)의 정경은? 도시화, 장례식장으로 바뀌었다. “죽음이 존재하는 사회가 온전한 사회요, 죽음과 함께하는 삶이 온전한 삶”이란다. 과거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랬다. 그래서 「맹모 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가르침은 더욱 중요한 인간교육의 진수다. 죽음이 가르치는 진리는 하나다. 죽어야 할 때 죽음으로서 영원에 이르는 생명이 유지된다. 죽어야 할 것이 죽지 않으면 죽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자” 독일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말테의 수기』란 책에서 아픈 사람들이 병원으로 모여들어 똑같은 침대 위에서 죽는다고 탄식을 하며 “이제 자신만의 고유한 죽음을 가지려는 소망은 점점 희귀해진다.” 했다. 충남 대 병원 유인술 교수는 “병원으로 실려 오는 환자의 2~30%가 ‘죽으러 오는 환자’라고 보면 된다.” 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교육을 미리 한다면, 당황해서 병원으로 달려갈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인간이 노력을 해도 한계점이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죽음’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인도의「아툴 가완디」의 문제의식은 우리가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무엇을 위해(때문에)? 

 

 

 

  • 도배방지 이미지

시니어 많이 본 기사